[FFK울산함급] 기본설계 과정 (2) 밀리학개론

지난번에 쓴 글에 이어서 2012년을 맞이하여 33살이 된 FFK 울산함급의 기본설계과정부터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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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기본 설계

 1976년 12월 31일 해군은 현대 조선소에 한국형 구축함의 기본설계를 발주했다. 계약금액 19.4억, 완료일자 1978년 3월 31일, 특수조건으로 설계비는 사후 정산하고 국내외 설계기술 인력참여를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1977년 1월 15일(토) 나는 조함 과장직을 해사 동기생 신동백 중령에게 인계하고 조함, 병기, 통신분야에 근무하는 장교 15명을 거느리고 당시 서울 광화문 소재 현대자동차 사옥 3층에 마련한 설계실로 자리를 옮겼다. 앉을 자리도 마련되어있지 않는 상태였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첫째. 설계에 참여한 기술자들 전원을 4개조로 나누어 교대로 진해에 파견 각종 전투함에 3일간씩 승선시켜 군함의 운용과 지휘통제, 해군 고유의 군율과 관습을 파악토록 하고, 둘째. 기본 설계에 참여할 외국인 기술자 채용을 마무리 하는 것이었다. 약 1년간 구축함 설계를 수주하겠다고 주한 미 해군 고문단장까지 동원했던 JJMA사가 기본 설계에 기술자 6명을 참여시키겠다고 $1.784.250을 제시해 왔다. 약 일주일간의 협상 끝에 2월 12일 이를 72M-M(Man-Month), 94만$에 용역 계약을 체결토록 했다. 셋째. 해군이 요구하는 함정에 관한 개략적인 제원과 성능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함포, 사통장비, 추진 체계 등 중요장비에 관한 기술자료가 없었다.
 
 2월 24일 함정감 손진수 제독(해사 7기)를 모시고 안기원 소령(해사 20기)과 함께 미국 방문 길에 올랐다. 목적은 미 해군성과 선박 연구소(NSRDC)를 방문, 설계용 기술자료를 구하고, 설계할 배의 저항 및 운동시험과 기본설계를 검토해 줄 것과, 신형 사격통제 장치 및 개량된 함포를 공급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약 10여 일을 워싱턴에 머물면서 관련부서와 접촉해 본 결과, 전부 이런 저런 이유로 불가하다는 대답이었다. 특히 당시 미 해군 신조함정에 설치하는 사격 통제장치 MK92 MOD-2는 SIGNAL사의 WM-28 SYSTEM을 미국에서 LICENCE 제작하는 것으로 3국에 판매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미 해군성 OP-63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워싱턴 체류 마지막날로 기억하는데 해군성 OP-63을 찾아 P.G BOYD 해군소장과 인사를 나눈 후 실무진과 회의를 가졌었는데 미국 측 책임자 격인 ANDERSON 대령 외 2명이 참석했었다. 회의가 증반쯤 진행되는데 ANDERSON 대령 이 친구가 구두를 신은 채로 양다리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고는 하는 소리가 "당신들 꿈을 꾸느냐? 한국 해군이 아무런 기술도 없으면서 어떻게 군함을 만든다는 거냐?" 질문 반, 비아냥 반, 우리 일행의 기를 죽이는 정확히 예의에 어긋나는 경멸조의 말을 서슴없이 내 뱉었다. 나는 그런 꼴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격투를 벌릴 수도 없고, 회의를 끝내자고 건의하여 더 이상의 아무런 결과 없이 회의를 끝내고 PENTAGON의 그 긴 통로를 걸어 나오면서 다시는 미 해군에게 설계 문제로 아쉬운 소리를 안 하기로 결심했었다.
 
 3월 6일 함정감은 귀국하고 나하고 안소령은 SPERRY사를 둘러본 후 네덜란드로 향했다. 3월 9일 SIGNAL사에 도착, 회사의 연혁, 영업실적, MK-92를 사격 통제 장비 WM-28 개발경위와 일본해상 자위대 DDH(HARUNA형) 사격 통제장치 판매 경위를 청취하고 공장시설 및 LAND BASE TEST SITE 등을 둘러보고 설계할 배의 개략적인 WEAPON SUIT를 설명하고 그에 알맞는 사격 통제 장치의 OFFER를 입수하고, 그 이튿날 나는 네덜란드 WAGENINGEN 선박 연구소로, 안소령은 프랑스에 있는 THOMSON사로 각자 다른 임무를 띄고 헤어졌다. 안소령은 THOMSON사에 가서 사격 통제장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OFFER를 받아 가지고 3월 17일 서울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목적지로 떠났다. 내가 WAGENINGEN 선박 연구소를 찾은 것은 미국 해군으로부터 거절당한 설계할 배의 저항 및 운동시험 시설을 파악하고 우리가 요구하는 시험의 가능 여부와 그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3월 12일 연구소에 들러 시험시설 및 설비 규모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시험종목을 파악하고 우리가 해야할 시험종목을 제시하고 시험기간, 정확도, 가격 등에 관하여 논의한 결과 시험기간은 6개월, 비용은 약 18만$이 소요된다는 OFFER를 받아 가지고 이튿날 C.P.P(CONTROLABLE PITCH PROPELLER)제작사 ESCHER WYSS가 있는 독일의 RAVENSBURG에 도착했다. 3월 14일 ESCHER WYSS사를 방문, 현장을 둘러보고 이론적으로만 알고있던 C.P.P의 제작과정과 ENGINE THROTTLE과 PROPELLER의 PITCH CONTROL 기술 등 많은 것을 배우고 척 당 가격 약 80만$이라는 가격 자료를 수집하고 3월 15일 귀국 길에 올랐다.
 
 3월 17일 나는 19시, 안소령은 21시 김포에 도착함으로서 21일간의 긴 여행을 무사히 끝냈다. 1977년 4월 1일 참모총장께 출장결과 보고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참모차장을 비록한 해군본부의 전 참모들이 배석했다. 먼전 출장결과 보고를 마치고, 다음으로 설계기준이 될 한국형 구축함의 제원 및 성능으로서

●제원 100m × 13m × 3.5m
●설계톤수 : 1800톤
●항속거리 : 3500해리
●작전해상상태 : Sea State ⅴ
●추진계통 :  CODOG System
●무장 :  76m × 3문, 30mm × 4문
●승조원 : 170명

 등의 내용을 보고하고 사격통제장비로서 SIGNAL사의 WM28을 건의 승인 받았다. 이 보고를 통해서 기본 설계를 위한 개념설계를 확정지을 수 있었다.



 
 ◎ 왜 함정 톤 수를 1800톤으로 했는가?

 설계할 함정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시한 항목은 속력 35노트였다. 오늘날 우리 정부가 햇볕정책을 쓸 정도로 우리의 국력이 신장되었지만 1970년대 우리 국력은 오늘날과 같이 강하지 못했다. 동, 서, 남해를 휩쓸고 다니던 간첩선에 대항하기 위해서 기동력이 좋은 35노트 이상의 전투함이 필요했다. 2차 대전시 기존 전투함정의 추진체계인 증기터빈체계는 그 부피와 중량을 줄이지 못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CODOG(Combination Of Diesel Or Gas-turbine) SYSTEM이 등장해 있었다. 이 체계의 장점은 해상경비 임무를 수행할 때나 순항 시는 Diesel 엔진을 사용하고 비상시 적을 추격할 때는 Gas-turbine을 사용함으로서 기동성이 우수하고 연료 소모를 극소화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SYSTEM이었다.

 당시 확보 가능한 Gas-turbine은 미국 G/E사의 LM2500과 영국 Rolls Royce사의 Olympus(TM-3)가 있었다. 두 장비 모두 출력은 25,000 마력으로 비슷했다. 함정의 크기를 결정함에 있어서 추진 엔진 마력 50,000 마력을 기준하여 속력 35노트를 낼 수 있는 함정의 크기는 설계 톤 수 약 1800톤이었다. 기존 구축함에 비하여 그 크기는 작지만 화력이나 기동력 및 주거 공간은 기존 구축함에 비하여 대폭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었다.(참고-여기서 기존 구축함이란 당시 한국해군이 운용했던 플래쳐급/기어링급 DD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중요장비들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크기는 작아지고, 자동화, 원격 조정화가 가능하여 승조원 수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해수 중에서도 부식이 없는 알미늄 합금(AL alloy) 강재가 개발되어 상부 구조물(Superstructure)의 중량을 대폭적으로 중일 수 있어 갑판 상에 중무장을 해도 높아지는 무게 중심 문제가 없어 공간만 배려하면 되었다. 알미늄 합금강 시공 기술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72년 해군이 30톤급 대간첩작전용 고속정을 조선공사에서 건조하면서, 그리고 그 후 1974년 코리아 타코마가 PK정을 건조하면서 두 회사가 알미늄 합금강 가공과 용접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 추진 체계(Propulsion sysrem)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투함의 추진체계에는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 CPP(Controllable Pitch Propeller)가 개발된 것이다. 고정익 프로펠러(Fixed Pitch Propeller)는 한 속력에서 최고 효율을 낼수 있는 반면, 가변익 프로펠러(CPP)는 어떤 속력에서도 추진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으므로 연료 소모를 줄일 수 있다. 따라서 프로펠러는 CPP를 택하게 되고, CODOG system에서 주역을 담당할 감속기(Reduction Gear)는 Swiss의 MAGG Gear, 가스터빈은 미국 G/E사의 LM2500, CPP는 독일의 Escher Wyss제, 그리고 Diegel Engine과  System control board, 그리고 system Interface는 당시 이 분야에 경험이 있던 MTU가 책임을 지기로 했다.


 ◎ 무장배치

 한국형 구축함에서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주포가 주갑판상이 아닌 0-1 갑판에 있는 점이다. 설계당시 뿐만 아니고 지금도 찾아보기 힘든 주포의 배치였다. 이 배치에 대하여 해군 고위참모들은 물론 해군 참모총장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참모총장은 내가 이 배치를 주장하는데 대하여 때로는 꾸중을, 때로는 달램으로 주포는 주갑판에 설치해야 한다고 나의 건의를 거절했다. 매번 "다시 검토하겠습니다."면서 물러나고 2~3일 후면 다시 총장께 주포를 0-1 갑판에 설치할 것을 되풀이 건의하였다. 내가 주포의 위치를 0-1 갑판으로 주장한 배경에는 과거 우리 해군의 쓰라린 경험을 한국형 구축함에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나의 중위 시절에 대형 함에 간첩선이 함포의 사각지대로 바싹 접근하여 기관총을 난사하고 도망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수치스럽고 가슴 아팠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1978년 2월 22일 무장배치에 대한 총장 보고가 있었다. 나의 브리핑을 듣고 있던 총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이, 주포가 0-1 deck에 설치된 전투함이 어디 있느냐?"하고 이번에도 거절할 태세였다. 나는 "구축함이 간첩선을 잡아야 하는 경우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총장 질문을 반박(?)했었다. 총장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알았다"하고 품의 서류를 승인했다. 군수부장 및 참모차장 브리핑 횟수까지 합쳐 총 9번만에 무장배치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 건조사양서 

 함정의 기본 설계 과정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 건조 사양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미국 해군은 우리 해군이 성장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지만 유달리 우리 해군이 함정의 건조능력을 갖추는 데만은 매우 인색했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76년 나 혼자서 기본 설계를 국내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해군이 사용하고 있는 함정 건조사양서(General specification for ships United States Navy)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이 사양서 입수는 우리의 해군 조함사에 큰 공헌을 한 대목이라 생각되어 그 입수 과정을 설명하면, 1974년 해군이 미국의 타코마 조선소에 발주한 200여톤급 알미늄 고속정 건조 감독관으로 임명된 김국호 대위는 해군본부 조함과에 근무할 때 많은 종류의 고속정을 설계하면서 건조 사양서 작성의 고충을 체험한지라 타코마 조선소의 도서관에서 미 해군함정 건조 사양서를 발견하고 670여 페이지나 되는 미 해군의 함정 건조 사양서를 슬쩍(?)하기 위하여 몇달간 도서관을 관리하는 할머니께 아양(?)을 떨면서 각별히 친해진 다음 어느 날 그 크고 무거운 사양서를 잠바 속 겨드랑이에 끼고 도서관 문을 통과 그 소중한 자료를 입수해 가지고 귀국했다. 이 사양서는 1976년 이 설계 사업을 외국에 의뢰하지 못하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약 20권을 복사하여 현재도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현대는 1978년 3월경 기본설계가 끝날 무렵인데도 건조 사양서를 작성할 엄두도 못냈다. 거금을 주고 초청한 JJMA 사람들도 속수무책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해군이 분야별로 건조 사양서를 작성하는데 해군들 역시 사양서를 작성해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미 해군의 함정 건조 사양서를 번역하는데 그대로 번역했다가는 건조비가 턱없이 비싼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양서에 인용된 Military. spec.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는 사양서가 완성될 수 없었다. 예로서 함정의 발전기 사양을 작성하면서 생성되는 "전류의 질은 Mil. spec.에 의한다"로 건조 사양서에 표시되어 있는데 그대로 옮겼다가는 발전기의 가격이 2.5배로 껑충 뛰는 경우가 생겼다. 수 많은 부분의 이런 현상을 해결하는데 궁여지책으로 내가 Mil. spec.에 대한 해석을 해서 그대로 적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판정관(?) 역할을 하게 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 해군의 함정 건조 사양서는 그 후 PCC(초계함)급 건조에도 사용되고 지금도 해군의 함정 건조 사양서의 표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설계검토(Design Review)

 기본 설계가 끝날 무렵 1978년 초부터 설계 검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해군사상 처음이고 더욱이 막대한 국가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의 성패가 달려있는 기본 설계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문제는 전투함의 기본 설계를 하려면 완벽한 작전소요가 전제가 되는데 해군의 공식적인 작전소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 검토 작업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해군이 설계 검토과정에 참여를 요청한 회사는 미국의 Gibbs & Cox, Henry Rosenblatt사, 영국의 Y-ard사 등이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부득이 JJMA사와 기본설계에 참여하지 않았던 직원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용역비 9만$에 기본설계 검토 계약을 맡기게 되었다. 1978년 6월 12일부터 2주간 울산에서 기본설계 검토를 마치고 6월 28일 해군본부 장성 식당(지하 1층)에서 군수부장을 비롯화여 관계관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본설계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지적사항은 그간 해군이 지적했던 사항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윗 분들은 큰 결함사항이 없었다는 보고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군수부장께서 폐회를 선언하려 하는데 내가 일어서서 설계검토 결과가 잘된 설계라고 하나 매우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설계에 대한 최종 결론을 얻는데는 다음 사항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항목이 누락되어 있었다. 즉

1. 개념설계에서 기본설계까지 Work scope와 그 내용의 충실도
2. Design criteria의 적합성
3. 각 장비 선정 기준의 적합성
4. 설계 진행 과정에서 Trade off logic의 타당성
5. 전투함 설계에 있어서 분산과 통합 원칙에 입각하여 설계되었는가?
6. Hull characteristics가 KFX에 적합한가?
7. Damage stability의 적합성
8. Intact stability의 적합성
9. Subdivision 등의 적합성
10. Sonar의 위치
11. Gun blast에 대한 structure 강도
12. In-board arrangement
13. Out-board arrangement
14. Ammunition handling, storing facilities
15. Manning study
16. HVAC system의 Type 및 용량의 적합성
17. Shaft vibration
18. Power voltage selection
19. Power distribution 방법
20. 모든 Access의 타당성
21. tank arrangement

 등등에 대한 세밀한 검토 없이 그냥 설계가 잘 되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더니 율국 사업차장이 "이제와서 무슨 소리냐"고 꾸짖길래 설계검토를 어떻게 하라고 교육까지 시켜야 하느냐고 맞섰더니 오늘 논의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만 해도 본전을 뽑았다고 하길래 아무대꾸도 하지 않았다. 군수부장은 매우 못마땅하여 부장실로 올라가자고 하면서 산회, 20시가 넘었는데 부장실에서 미국인들과 재 회합, 나는 서투른 영어로 누락된 사항과 어떤 결론을 낼 수 있는 근거도 없이 설계가 잘 됐다고 할 수 없으니까 잘 되었으면 왜 잘 됐다는 것을 근거를 대는데 내가 제시한 사항들이 상세하게 검토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결론이 유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더니 군수부장님도 어느정도 성이 풀어지고 미국인들에게 내가 제시한 제목들을 영어로 다시 읽어주고 그들은 받아쓰고 하여 그대로 Comment를 내기로 하고 산회, 집에 도착하니 22시였다. 그 동안 JJMA사가 상세설계 및 건조과정에도 참여하겠다고 현대와 해군본부를 자주 접촉해 왔었는데 이 소동이 있은 후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기본설계 완료

 계약 완료일을 이틀 앞둔 1978년 3월 29일까지 완료된 문건을 조사한 결과 총 319건 중, 40.7%인 130건이 완료되었다. 투입된 설계 인력 54명이 15개월 동안 130건을 완료하였으니 공휴일과 일요일을 합한 3개월을 제외하면 문건당 4.98M-M(Man-Month)가 소요됨 셈이었다. 계약 방식이 도급이 아닌 정산제가 갖는 폐단의 일면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미완성 부분은 "현대가 책임을 지고 완료한다"는 이행각서를 쓰고 1978년 3월 31일 기본설계는 완료된 것으로 처리하였다. 기본설계비 약 3.45억원이 절약되었다. 이는 계획되었던 Model test 중 함정의 운동시험과 Propeller Cavitation 시험을 삭제하고 외국인 용역인력 축소 등의 비용에서 절감된 금액이었다.  제원 및 성능은 다음과 같다.

●길이: 102m / ●폭: 11.5m / ●깊이: 3.5m
●총 톤수: 2200톤
●주기관: CODOG system
●속력: 35노트
●항속거리:  4000해리
●승조원: 180명
●무장 : 76mm × 3문, 30mm × 4문, Harpoon × 12발, 폭뢰 8발 (글에는 계속하여 76mm가 3문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단순오타인지 아니면 실제 개념/기본설계과정에서는 76mm 3문을 탑재할 계획이였는지 의문입니다.)
●SONAR : 1기



(출처-'1970년대 해군의 조함사업' 엄도재 해군준장(전) )



P.S) 상세설계 및 건조부터 진수/인수식까지의 내용에 대하여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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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긁적 2012/01/03 15:47 # 답글

    구축함의 주 임무 : 간첩선 추격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식빵스러움 2012/01/03 16:48 #

    1970년대 한국해군은 북한보다 작전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처지인지라,

    "구축함이 간첩선을 잡아야 하는 경우는 어디 있습니까?"- 씁쓸하면서 당시 상황에서 부정할 수 없던 것이죠.
  • band 2012/01/03 22:31 # 삭제

    70년대 해군에서 고속,장거리순항할수 있는 존재가 DD/DE밖에 없었으니까요. 항공기에 의한 대함공격은 엄두도 힘들때고(공군작전기도 부족할때니) 각군의 경쟁에서 제일 밀리는 해군이니........뭐 가라면 가야죠. 그때는 그나마 보일러가 덜 터질때였으니까요...-..-
  • 포항시민 2012/01/03 17:52 # 답글

    71포 위치 때문에 군에 있을때 아침에 FF 병기병들 보면 참 불쌍했죠 ㅎㅎ
  • 식빵스러움 2012/01/03 18:35 #

    위치때문에 포구손질도 곤란하고 포카바 쒸우고 벗기는 것도 애먹었듯 합니다. FFK가 포덕후 함이라 병기병 대비 포가 너무 많아서 병기병들은 죽어나지요~(초임하사 없으면 도와줄 사람도 없고..)
  • 포항시민 2012/01/03 21:29 #

    그렇죠 PCC도 만만치 않긴 하지만, 거기에 지금은 모르겠는데 제가 군에 있을 때는 PCC는 병기병 3~4명 이었는데, FF는 1명이라서, 초임하사 마저 영외 나가면, FF탄 동기가 불쌍하더군요.
  • 누군가의친구 2012/01/03 22:10 # 답글

    포의 위치나 함선의 속도를 보면 어쩔수 없는 당시 현실이지요. 그렇다 해도 포를 그 위치에 둔건...ㄱ-

    그런데 아쉬운건 헬기 격납고가 없다는 걸까나요?
  • 식빵스러움 2012/01/04 01:33 #

    시작은 한국형구축함사업이라고 불리었지만, 현실은 프리깃중에서도 크다고 볼 수 없는 톤수라서...
    당시에 한국해군이 수상함에서 헬기를 운영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 kuks 2012/01/03 23:54 # 답글

    작년에 울산급 2번함인 서울함으로 제주에서 목포까지 11시간 가량을 탑승한 적이 있습니다.
    관리는 상당히 잘 되고 있었는데, 퇴역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이야 부족함이 많아 보이겠지만 연안해군으로 발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주포위주의 무장배치나 헬기데크의 부재 등은 그런 이유라고 생각하구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혹시 내용 일부를 인용해도 될까요?
    인용하게 되면 원출처와 함께 식빵스러움님의 재인용출처도 밝히겠습니다.
  • 식빵스러움 2012/01/04 01:39 #

    과거에 서울함이 2함대에 있다가 3함대로 배속되었다는데, 그 배를 타셨군요.(서울함이 기관부 ㅂX으로 예전부터 유명했던 녀석이였는데...)

    인용하셔도 되용..(전 그냥 옮겨적은 것 뿐이니까요..)
  • kuks 2012/01/04 01:54 #

    네, 그런데 제가 직접 승조원에게 들은 것은 1함대(강릉)에서 3함대로 배속되었다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 식빵스러움 2012/01/04 02:22 #

    그럼 2함대-1함대-3함대로 옮긴거군요. 5년전엔 2함대소속이라 놀러가고 그랬었는데,,

    감사합니다.
  • 드레이크 2012/01/04 14:13 # 답글

    70년대 한국에 대한 취급은 매우 안습하군요(대령이 발꼬고 무시발언을 쏴댈정도면...) 그건 그렇고 알레이벅 옆에 울산급(952 니까 서울함) 는 많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 식빵스러움 2012/01/04 15:54 #

    FF를 가지고 RIMPAC과 순항훈련까지 뛰던 한국해군인데요..ㅋ 항모옆에서도 당당함(?)을 유지~!

    70년대 전투함 설계/건조한 것은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이 이루어진 듯 합니다.(미국은 관심이 없었고 실적좋은 해외 함정설계회사들도 마찬가지, 유일하게 미국고문단과 꿍짝꿍짝한 JJMA가 호갱님..호갱님하면서 온게 전부....)
  • 지나가던 1인 2012/06/16 15:11 # 삭제 답글

    이거참 정확히예기할순없지만 서울함은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2함대에서 교육사령부? 혹은 3함대에 내려갓습니다.
    있는게 민폐엿죠 출동나간진 1시간만에 엔진고장은 다반사여서 차라리 전력외로 구분하는게 맘편할정도였습니다.
    작년 제작년 2함대 병근무
  • 식빵스러움 2012/06/17 14:00 #

    서울함의 추진계통문제는 아직도 진행중인가 보네요..
    1년 이상 수병으로 근무한 사람이 바다를 나가본적이 없다는 유명한 일화가...(수리때문에 건선거에 올려져서 내려오지를 못함.ㅡㅡ;;)-2함대 있을때 이애기들은 것이 벌써 7년전 이야기....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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